최초의 원폭 실험에서 실제 투하까지 불과 3주그 긴박한 하루하루를 집요하게 추적한 역사 다큐멘터리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한 원자 폭탄은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으로 8만여 명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갔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역사학도인 저자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에 따라 원자 폭탄 투하 작전을 재구성한다. 원자 폭탄 제작을 책임진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스탈린을 따돌리고 실제 투하를 결정한 처칠과 트루먼, 요동치는 B29 기내에서 원자 폭탄을 조립한 폭격수,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들의 체험담까지, 역사의 현장에 서 있던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 최초 실험에서 실제 투하까지 3주간을 하루하루 추적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진실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 시 상공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 폭탄이 폭발했다. 원자 폭탄은 8만여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맺었으며 이후 40년이 넘게 지속된 냉전의 막을 열었다. 도서출판 황금가지에서 발행한 『카운트다운 히로시마』는 첫 폭발 실험에서 실제 투하까지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사건 중 하나인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보여 준다.이제까지 원자 폭탄을 주제로 씌어진 책은 많았지만, 대개는 원자 폭탄 개발 과정을 다룬 미국 저자의 과학서이거나 일본 측 시각에서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참상을 다룬 휴머니즘적 시각의 책들이었다. 그러나 『카운트다운 히로시마』에서 작가이자 12년간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으로 일한 저자 스티븐 워커는 최초 원폭 실험과 실제 투하까지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당시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이들을 인터뷰했다. 원자 폭탄 제작을 책임진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스탈린을 따돌리고 실제 투하를 결정한 처칠과 트루먼, 요동치는 B29 안에서 원자 폭탄을 조립한 폭격수, 그리고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들의 체험담까지, 사상 최대의 작전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 최초 실험: 1945년 7월 16일최초의 원폭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의 호르나다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미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가 전권을 맡아 추진한 ‘맨해튼 계획’의 첫 성과였으며, 이론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지휘해 성공시킨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싼 과학 실험’이었다.워싱턴의 전쟁성(Department of War)은 당시 독일 포츠담 근교의 바벨스베르크에 머물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성공 소식을 전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원자 폭탄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일본에 사용할 것임을 영국 수상 처칠에게 알렸다.
▶ 막후 협상: 1945년 7월 17일~7월 26일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해 포츠담에 모인 스탈린, 처칠, 트루먼은 전후 세계 구도를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해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이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스탈린은 만주 북쪽 국경지대와 알류샨 열도에 소련군을 집결시키고 일본에 공세를 가할 참이었고, 트루먼은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개발한 원자 폭탄이 완성되기만 기다리던 참이었다. 마침내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트루먼은 원자 폭탄을 사용해 일본을 항복시킬 뿐 아니라 스탈린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 주어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구상을 끝마친 다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내용의 포츠담 선언문에 합의했다.당시 주(駐)소련 일본 대사였던 사토 나오타케는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른 채 소련 정부에 연합국과의 정전 협정을 중재해 달라고 사정하는 중이었다. 전쟁에 패배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눈앞에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일본 외무 장관 고노에 후미마로는 히로히토 일왕의 위임을 받아 소련을 방문해 정전 조건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스탈린은 이미 일본을 구제할 의지가 없었다. 이처럼 2차 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과 소련은 이미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세력 다툼을 시작했으며, 트루먼은 처음부터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을 즉각 항복시킬 무기로 원자 폭탄을 사용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원자 폭탄이 아무런 예고 없이 서둘러 투하된 까닭이었다.
▶ 투하:1945년 8월 5일~8월 6일한편 7월 16일에 원폭 실험이 성공하자마자 미 해군의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호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이 배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제작해 둔 플루토늄 핵심을 싣고 실험 성공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험이 성공하자 인디애나폴리스 호는 서태평양의 티니언 섬에 만들어진 일본 본토 폭격용 비행 기지로 플루토늄 핵심을 실어 날랐고, 원자 폭탄은 이곳에서 운반되기를 기다렸다.원자 폭탄의 표적으로 히로시마가 선정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대도시들 가운데 그때까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 관계자 및 미군 고위 장성들로 구성된 공격 목표 선정 위원회는 그해 4월 27일에 열린 회의에서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니가타 등을 예상 공격 지점으로 선정했다. 표적의 조건은 “일본에 가장 막중한 심리적 충격을 가할 뿐 아니라 원자 폭탄에 관해 공식 발표할 때 국제적 인지도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규모가 큰 도시”였다. 인구 30만의 규모에 육군 보급창과 군용 항구가 있을 뿐 아니라, 낮은 구릉대로 둘러싸여 고공에서 조준하기 쉬운 히로시마는 그야말로 최적의 표적이었다.티니언 섬으로 운반된 원자 폭탄은 8월 6일 새벽에 편대장인 폴 티비츠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명명된 B29 폭격기에 실려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먼저 떠난 관측대가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에서 현지 상공의 기상 상태를 보고했고, 하늘이 가장 맑았던 히로시마가 표적으로 선택되었다.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도심 상공 550미터에서 폭발한 원자 폭탄은 화염과 후폭풍으로 도시를 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었다. 에놀라 게이의 폭격수가 표적으로 삼은 T자형 교량 ‘아이오이바시 다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로 ‘상생(相生)의 다리’라는 뜻이었다.
▶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원폭 사용의 정당성 논쟁최초의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그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적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중의 군사 행위일 뿐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전략적 목표물이 아니라 민간인이 거주하는 대도시의 도심 지역에 예고 없이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악스러운 사실이다.저자는 “지나간 60년 전의 세월을 다시 펼쳐보고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순간을 되짚어보기에 지금보다 더 절실한 때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60주년이자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6자 회담이 진행 중인 올해 여름, 『카운트다운 히로시마』는 원자 폭탄이 이룩한 ‘평화 아닌 평화’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히로시마가 남긴 교훈과 원자 폭탄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시작하는 말서막_ 카운트다운 12시간 전제1막 최종연습1945년 7월 15일~16일제2막 결정1945년 7월 18일~26일제3막 투하1945년 8월 4일~6일제4막 충격1945년 8월 6일~7일대단원감사의 말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