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 사상 첫 3관왕 석권 「종이 동물원」 수록,
2017년 로커스 최우수 선집상 수상. 휴고 상 수상작 「모노노아와레」수록.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SF 환상문학 작가 켄 리우의 대표 단편 선집. 권위의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40년만에 첫 동시 수상한 대표작 「종이 동물원」을 비롯하여 SF에서부터 환상문학,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전기(傳奇)소설에 이르기까지 켄 리우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은 어린시절, 선물 포장지를 사용해 종이 동물을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어주던 중국인 어머니와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짧지만 가슴 찡한 감동으로 단숨에 켄 리우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또한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굵직한 사건들을 SF 환상문학 장르에 녹여낸 작품들도 대거 수록되었는데, 한 과학자 부부가 과거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이를 통해 일본군의 731부대의 잔학성을 다큐 형식으로 그려낸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패망하지 않은 일본이 강제징용을 통해 미국과 해저터널을 잇는다는 대체역사물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제주 4.3 사건의 아픈 역사와 닮은 대만 2.28 사건을 소재로 한 「파자점술사」, 문화 대혁명에 대해 다룬 「종이 동물원」, 서양 열강의 경제 침탈을 환상문학과 스팀펑크 장르로 다룬 「즐거운 사냥을 하길」 등 국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낼 여러 단편소설을 만날 수 있다.
이 외에도 개인의 모든 결정을 인공지능이 대신해 주는 디스토피아를 경고하는 「천생연분」, 몰래카메라와 이와 관련된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을 그린 하드보일드 「레귤러」, 인격을 가상현실로 복제하여 체험하는 기계를 소재로 한 「시뮬라크럼」 등 장르적 재미와 완성도를 모두 갖춘 수작들도 수록되어 있다. 총 14편의 중단편 소설로 구성된 『종이 동물원』은 2017년 권위의 로커스 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하였다. 켄 리우는 이 외에도 2015년 중국 SF 작가로는 처음으로 휴고 상을 수상한 류츠신의 『삼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는 등 동양과 서양의 SF 교류 역할을 하고 있다. 2019년에 켄 리우의 장편소설 『민들레 왕조기 1 – 제왕의 위엄』과 『켄 리우 단편 선집 1, 2』권이 차례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이 단편집은 내게 추억의 맛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는 (문학상 후보작과 수상작이라는 기준을 따르자면) 나의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들뿐 아니라 나 스스로는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리 빛을 보지 못한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 내 생각에는 나의 관심사와 집념과 창작 목표를 눈에 선하게 잘 보여 주는 이야기들인 듯싶다.”―저자 머리말 중
“이 단편의 제목(동물원을 zoo 대신 menagerie로 쓴 이유)은 실제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 동물원(The Glass Menagerie)」에 대한 암시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유리 동물원」의 등장인물 로라처럼) 한결같이 약하고 여리기만 한 존재로 보이는 어머니가 종이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크나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지요.”―일본어판 저자의 말
‘신부로 팔려 가려고 자기 사진을 카탈로그에 싣다니,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내가 세상일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경멸의 맛은 달콤했다. 와인처럼.―「종이 동물원」 중
SF 환상문학과 역사 의식의 접목, 한국인들에게 공감대를 부를 소설들
수록작 중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과거의 정보와 기억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731부대의 희생자 유족을 과거로 보내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태로 풀어낸 소설이다. 작중 731부대의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한편, 관련자의 증언과 일본의 로비, 미국 정치계의 대립 등을 실제처럼 구성하여 네뷸러 상과 휴고 상 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할만큼 큰 화제가 되었다. 저자는 코멘트를 통해 수많은 실제 관련자 인터뷰와 기사, 서적, 특히 미국 하원 ‘종군 위안부 관한 하원 결의안 121호’를 의결하기 전에 개최한 청문회를 참고하였다고 밝히면서 731부대의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집필했다고 밝힌다. 또한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켄 리우의 단편집이 일본에서 정식 출간될 때 수록되지 않았으며, 중국 역시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 곳을 삭제한 불완전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대체역사소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은 ‘만일 2차 세계대전 대신 일본이 미국, 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조선과 만주를 지배했다면?’이란 설정에서 시작되는 소설로, 강제징용을 통해 불법적으로 노동력을 갈취하고 비밀을 숨기기 위해 징용자들을 몰살시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다룬다. 대만 2.28 사건을 소재로 한 「파자점술사」에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을 ‘me gook’으로 받아들인 미군에 의해 ‘gook’이 동양인을 비하하는 용어가 되었다는 유래를 얘기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미소 냉전 시대의 대만을 소재로 함으로써 한국인에게도 역사적 공감대를 제공한다. 이렇듯 켄 리우는 동북아시아 역사에 관한 관심을 작품에 적극 반영한다. 2019년 국내에 출간 예정인 그의 또 다른 선집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평양성 전투를 다룬 단편과 한글의 모양을 소재로 한 작품이 실릴 예정이다.
“욕구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남자들은 조선 출신 위안부를 찾아갔다. 하루 치 품삯을 지불해야 하기는 했지만. 나는 딱 한 번 갔다. 피차 너무 지저분한 몰골이었고, 여자 쪽은 죽은 생선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번 다시 위안부를 찾지 않았다. 동료한테 듣기로 위안부 중에는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라 제국 육군에 인신매매를 당한 여자도 있다던데, 내가 산 여자도 그런 경우였던 것 같다. 그 여자한테 딱히 미안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했으니까.”―「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중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익명의 인터뷰
SF 환상문학 장르로서 이상적이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대중을 사로잡다
켄 리우의 작품은 SF나 환상문학이 대중에겐 어렵다는 통념을 깨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기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일반 대중이 누구나 실생활에서 생각해 볼 만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럼」은 어린시절, 특수한 장치로 가상 외도를 하던 아버지를 목격한 딸이 평생을 그를 멀리하게 된 사건을 소재로, 아버지와 딸의 입장을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천생연분」은 인공지능에 의해 만날 상대자, 음식점, 업무까지 모두 맡겨버린 미래, 인공지능을 운용하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강력해진 미래를 다룬다. 인공지능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류의 모습은 현재의 스마트폰이 삶의 중심이 된 현대인들에게 흥미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장르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들이 가득한데,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강시나 구미호를 잡던 도사의 아들과 구미호의 딸이 20세기 초반, 판타지 시대가 사라지고 증기 과학시대로 넘어가며 새로운 미래 세상에 적응하는 이야기를 다뤄 판타지와 SF 스팀펑크 장르의 흥미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네뷸러 상 최고소설 부문 후보에 올랐던 「파(波)」는 영생을 살게 된 인류의 머나먼 미래를 폭발적인 상상력으로 다룬다. 휴고 상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모노노아와레」 역시 우주로 나온 인류에 대한 작품이다.
“봤지요? 틸리가 없으면 당신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조차 기억 못 하고,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 못 겁니다. 이제 인류는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전자(電子)의 영역으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자아를 두뇌 속으로 다시 욱여넣기가 불가능합니다. 당신들이 파괴하려고 했던 당신의 전자 복제판은 문자 그대로 실제의 당신입니다.”―「천생연분」 중
머리말 7
종이 동물원 11
천생연분 35
즐거운 사냥을 하길 75
상태 변화 111
파자점술사 137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193
시뮬라크럼 207
레귤러 225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307
파(波) 331
모노노아와레 371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 403
송사와 원숭이 왕 431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471
옮긴이의 말 561
《종이 동물원》은 많이 들어본 책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전혀 안 해본 책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 책의 번역이 엄청 좋다는 추천을 받고 민음사 패밀리데이에서 사왔다. 번역이 좋다고 읽을 생각이 없던 책을 살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좋은 번역은 책을 사게 만들 수도 있다. 내가 한 책을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번역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번역은 책에서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나는 이걸 해리 포터 시리즈 구판을 읽고 깨달았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과 똑같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켄 리우, 《종이 동물원》, pp.8-9
이 책은 펼치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보통 작가의 말은 작품 소개글 정도로 생각하고 읽는데, 이 책의 작가의 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산문 같았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담긴 작가와 독자의 마음을 이토록 아름답고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행위 안에서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교차하고 만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엄청 큰 사람을 책을 통해서 만나고 대화한다. 책은 우리 모두를 이어줄 수도 있다. 작가의 책에 대한 깊은 사유와 애정이 느껴져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인데도 이 책이 너무 좋았다.
이 책은 1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SF를 기대하고 책을 펼쳤는데, 생각과는 달리 과학기술의 요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과학의 법칙에 구애받는 세계라기보다는 과학기술을 발판 삼아 작가가 하고 싶던 말들을 담은 소설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해하기에도 더 쉬웠고, 과학의 장벽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이 단편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은 “종이 동물원”, “상태 변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었다. “종이 동물원”의 주인공은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어머니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주인공을 키웠다.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종이로 동물을 접는 것이었는데, 주인공은 어머니가 숨결을 불어넣어주면 동물들이 살아난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느날 같이 놀던 아이가 그 종이 동물들을 쓰레기라고 치부하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낀 주인공은 종이 동물들을 치워버리고 어머니와 멀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아들과 대화해보려 애썼지만, 주인공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영어를 쓰지 않는다면 대화하지 않는다며 계속 거리를 두었다.
주인공은 어머니와 서먹한 사이를 유지하며 어른이 된다.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와의 사이를 바꿀 새도 없이, 어머니는 죽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집 한구석에서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종이 동물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안에 적혀 있던 어머니의 편지를 읽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과 속상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편지를 읽은 주인공은 많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과 그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 어린 시절 느낀 종이 동물의 마법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상태 변화”는 설정이 독특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사람의 영혼은 어떤 사물의 형태로 같이 세상에 나오고, 그 사물이 망가지거나 사물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사람 또한 죽는다는 설정이었다. 주인공 리나의 영혼은 얼음이었다. 얼음이 녹는다면 죽을 거라 했기에, 리나는 늘 그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해야 했다. 집에는 냉동고가 상시 돌아가고, 출근할 때에는 아이스박스를 이용하고, 회사에 개인 냉동고를 두고. 리나의 삶은 얼음을 녹지 않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 리나의 삶에 어느 날 지미가 등장하며 그녀의 삶은 뒤바뀐다. 리나는 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미는 그녀와 달리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리나는 그런 그를 몰래 좋아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리나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리나는 얼음이 녹더라도, 지미에게 고백하기로 정한다. 그녀는 얼음을 잔에 담아 지미의 방으로 가고,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다. 지미는 그녀를 받아주었고, 그의 방에서 리나가 나왔을 때 그녀의 얼음은 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리나는 멀쩡했다.
리나는 따스한 기운을, 매혹당하는 기분을, 가슴이 탁 트이는 해방감을 느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고요하고 공허한 리나의 마음 구석구석에 흘러 들어와 파도 소리로 리나의 귀를 가득 채웠다.
켄 리우, 《종이 동물원》, pp. 133-134
얼음이 녹는 건 리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었다. 얼음의 상태가 변하더라도, 리나의 삶은 이어졌다. 리나가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친구 에이미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녀의 영혼은 담배 한 갑이었는데, 에이미는 담배를 다 피우면 삶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영혼은 담배가 아닌, 담뱃갑이었다. 생각을 바꾼다면, 태도를 바꾼다면 삶이 바뀔 수도 있다. 꼭 형태를 유지해야만 삶이 이어지는 건 아니다. 큰 변화를 겪더라도, 삶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수 있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뵘기리노 입자라는 걸 통해 과거로 가 직접 그 순간을 볼 수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간 여행의 단점은 단 한 번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으로 뵘기리노 입자를 통해 가는 순간 그 과거로는 다시는 갈 수 없다. 이 방법을 개발한 과학자 기리노의 남편 역사학자 에번은 이를 이용해 일본의 731부대 실험을 직접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거를 직접 볼 사람들을 실험의 피해자들의 가족 중에서 뽑기로 한다. 이 결정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중국에서 벌어진 일본의 실험을 미국의 역사학자가 연구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세 국가가 엮인 사건을 그저 한 역사학자의 연구 아래 둘 수 있을까? 그리고 과거의 일로 현재의 정치적 동맹을 위태롭게 만드는 게 옳은 걸까? 둘째로는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자격 조건이었다. 그들은 그저 일반인인데, 과거의 모든 것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는가? 학자라 해도 단 한 번만 보고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기 어려울 텐데, 사감이 섞인 일반인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 한 번의 기회를 낭비하는 건 아닐까?
에번은 그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잊고 있던 역사를 기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피해자들에게 과거를 직접 볼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의도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학계의 전문성 사이에서 빠르게 왜곡되고 만다. 그의 연구에 제기된 질문들은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질문들과 책임감은 에번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는 끝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기리노는 그런 그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준다. 에번이 하고 싶던 일을, 그의 진짜 의도를, 그리고 사람들의 오해를. 이에 더해 기리노는 일본인이던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실은 731부대 실험 관련자였으며, 에번에게 이를 숨긴 걸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역사학자도, 진실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 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한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악을 심판하고 악에 맞서야 할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켄 리우, 《종이 동물원》, p. 538
역사적 책임은 분명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이 시점에서 에번 한 사람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고, 수많은 감정이 섞여 있으며, 온갖 이해관계로 이어진 역사를 에번이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과거를 딱 한 번만 다시 목격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이용할 것인가? 그 기회를 미래의 세대에게서 빼앗는 건 아닐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에번은 최대한 사실에 충실하고자 했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다만 그게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 단편 말고도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들이 많았는데, 중국과 비슷한 역사를 겪은 한국인으로서 생각해볼 지점이 많았다.
이외의 단편들도 모두 개성 넘치고 재밌었다. 판타지와 과학이 섞인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요괴와 스팀펑크가 어우러저 흥미로웠다. “송사와 원숭이 왕”은 전호리라는 인물이 그 나름대로의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조명하며 평범한 사람이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단편집은 한 사람이 열심히 맞서 싸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한 사람이 대단한 인물일 필요는 없다. 그저 그런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모두는 나름의 시련을 겪고 성장하며 누군가의 영웅이 되어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영웅이 되기는 글렀지, 안 그래? 나한테도 진짜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넨 특별한 선택에 직면한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때 자네가 한 선택을 후회하나?
아니. 전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고 이성의 빛이 천천히 꺼져 가는 동안, 굳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나. 미후왕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전호리 앞에 허리 숙여 절을 했다. 황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절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경배였다.
켄 리우, 《종이 동물원》, p.469
+번역이 엄청난 작품이다. 특히 “송사와 원숭이 왕”에 나오는 전호리의 노래 번역이 대단하다. 원문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노래의 운율과 의미를 모두 살리면서 번역하기란 어려웠을 것 같은데 그걸 모두 살려냈다.
/ 켄 리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 꽤 두꺼운 켄 리우의 단편집이다. 총 열네 편의 소설이 들어있으며 열네 편 전부 SF 혹은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이다. 작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켄 리우는 중국인이다.(물론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도 중국의 문화, 역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 중, 일을 서로 떼 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한국, 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출현한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나 원리 같은 것도 그다지 없어서 한국 독자가 처음 SF 소설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한국)의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몰입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두껍긴 하지만 단편집이라서 시간 날 때 한편씩 읽기 딱 좋다)
켄 리우의 소설은 지난번에 리뷰했던 테드 창의 소설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테드 창의 소설이 소설을 빙자한 과학적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면 켄 리우의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다. 켄 리우의 소설 속에서 과학은 Fiction의 설정이자 배경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가라고 할 수 있다. 켄 리우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Science가 아니라 Fiction이므로 에 실린 소설들에는 SF가 아닌 소설도 많다. 심지어 표제작인 부터가 SF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다른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다. 는 현대 판타지이고 는 중국의 전통적 주술 문화, 파자점이 이야기의 주춧돌이 되며 에서는 중국의 요괴와 SF적 요소가 뒤섞여 매력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게 켄 리우라는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SF 작가도 아니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며 장르문학 작가라고 한정 짓기도 꺼림칙하다. 그는 장르의 경계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SF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SF를, 판타지적인 배경이 필요하다면 판타지를, 역사나 신화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그 또한 거리낌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정통 SF 소설만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집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소설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개인적으로 켄 리우라는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배경을 바탕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삶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많은 혼란과 의문이 그의 청소년기를 뒤덮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 끝에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내가 어디 속하는지 혹은 어느 집단의 일원인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작가가 된 켄 리우는 마찬가지 생각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소설이 SF인지, 판타지인지, 역사나 신화 소설인지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켄 리우는 머리말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의 소설들을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계속해서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저 문장이 켄 리우의 소설들에 새로움과 놀라움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경계가 허물어질 때, 구분이 사라질 때,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합쳐질 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니까.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과 , 를, 환상과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과 , 를, 소설 속 드라마를 느끼고픈 이들에게는 과 , 을 권하고 싶다.
만약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소설집 전체를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나가길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
p557
진실은 연약하지 않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둡니다.
이 책은 실종된 고통과 인간성을 작가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구현해냈다.
p21
“으르라앙.”
라오후가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인신매매에서 구조된 기억을 가진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접기 동물들의 마법. 표제작 은 근현대 중국 이민자가 처한 정치적, 사회적 외로움과 전통적인 가족애를 절묘하게 휘감아낸다. 이 소설집의 놀라운 시작이다.
p536
희생자들을 새롭게 죽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SF와 판타지, 대체역사와 하드보일드를 뒤섞은 단편들의 강력한 힘은 현실의 작동원리가 진실을 얼마나 기이하게 회피하고 외면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p365
매기는 빛의 일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얼음과 담배갑과 소금이라는 영혼 ㅡ 그리고 기계와 세포의 영생 앞에선 죽음이 생의 아우성을 은유하고
빛보다 빠르게 과거의 빛을 추적해서 은폐된 역사의 영상을 획득하고 존재하지 않는 태평양 해저 터널에서는 제국주의의 증거를 사변하고 포착한다.
개인과 가족의 슬픔과 사랑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현재와 미래의 인간과 중국의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일본과 미국 ㅡ 어쩌면 한국까지 ㅡ 의 현대사를 조명하고, 이 소설집이 SF 판타지를 위한 진실이기 보다는 진실과 인간성을 피어내기 위한 SF 판타지임을.
p313
우리는 별개의 궤적을 그리는 무작위 입자 두 개였어.
우리가 사는 현재와 바라보는 미래의 궤적은 모두 과거와 현재의 일상이 어떻게 발광하는지에 달렸음을 암시한다.
생각보단 그냥그랬어요. 테드창의 수준을 기대했는데 약간 신파느낌이라 좀 실망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