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로부터의 편지

젊은이,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평화를 꿈꾸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스물여덟 편의 산문

원제 Krieg und Frieden

헤르만 헤세 | 옮김 강태호

출판사 황금가지 | 발행일 2003년 6월 1일 | ISBN 89-827-3470-8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40x205 · 256쪽 | 가격 9,000원

분야 기타

책소개

1914년부터 1948년까지, 세계 대전의 한가운데서 헤세가 보내는 평화의 메시지

편집자 리뷰

이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만 헤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편지와 에세이를 모은 것으로, 1914년부터 1948년까지 헤세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는 동안에 쓴 스물여덟 편의 편지와 에세이를 담았다. 원서는 스위스에서 『Krieg und Frieden(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헤세와 세계 대전
『황야의 이리』,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의 소설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정치적이거나 시사적인 문제보다 개인적 위기의 극복을 주제로 다루었다. 한 개인의 영혼에서 정치적 충동과 경향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세는 평생 동안 정치와 거리를 두고 지냈으며, 일찍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치적인 일에 애정을 가져 보려는 나의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성과 정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항상 서로를 배제한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는 당을 요구하고, 인간성은 당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헤세는 스위스 신문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에 「벗들이여, 그렇게는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으로 반전을 부르짖는 글을 기고한다. 그는 이 글에서 동료 지식인들에게 그때까지 인류가 성취한 모든 지적 유산을 파괴하는 전쟁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헤세는 조국 독일의 극우파들에게 극렬하게 비난받고 매국노로 치부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헤세의 삶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 소년기의 첫 번째 전환점 이후 가장 큰 변화였다. 이듬해인 1915년에 헤세는 스위스 베른에 전쟁 포로 후생사업소를 설치하고 포로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힘썼으며 이후 여러 신문과 팸플릿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자 헤세의 투쟁도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 제3제국의 성립을 선포하면서 일찍부터 나치즘에 반대해 온 헤세는 다시 한번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1937년 독일이 두 번째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독일에서 헤세의 책을 내는 출판사는 종이조차 배급받지 못했고, 헤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유리알 유희』는 중립국인 스위스에서만 출간될 수 있었다.
헤세가 말하는 평화
이렇게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억누르는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헤세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러 편의 글에서 ‘개개인의 각성’을 일관되게 부르짖었다. 헤세에게 평화란 전쟁이나 정치 활동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이미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생각이자 바람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진보가 그렇듯 평화는 깨달음을 통해 온다. 우리가 깨달음을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 삶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모든 깨달음의 대상은 하나다. 그것은 수천 명에 의해 수천 번 인정되고 수천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항상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 안에, 그리고 당신 안에 있는 활기에 대한 인식이자 신비한 마력에 대한 인식이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다.
― 본문(「전쟁과 평화」) 중에서
헤세는 진심으로 전쟁을 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주 극소수일 뿐이며, 대다수는 전쟁 그 자체와 전쟁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증오한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세계 곳곳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개개인이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평화를 발견하는 데 힘을 쏟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헤세는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전쟁을 인정하고 평화를 외면하는 정신적 나태함을 떨쳐 버릴 것을 호소했다. 이 책에서 헤세는 니체의 작품에 등장하는 초인 자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젊은이들에게 군국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기도 하고(「자라투스트라의 귀환」), 우화(寓話)의 형식을 빌려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유럽 문명을 비판하기도 한다(「유럽인에 관한 우화」).
책의 서문에서 헤세가 밝힌 것처럼 이 책을 묶어 내는 일은 헤세에게 있어 결코 즐거운 작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전쟁 기간의 끔찍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나 헤세는‘지식인의 의무는 국익과 종교를 초월하여 인간 정신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헤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을 등지고 동포들에게 비난받으며 홀로 세상과 대립할 수 있었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미 지나간 고통과 혼돈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독자들에게 평화를 지킬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본문 소개
「벗들이여, 그렇게는 이제 그만!」헤세가 1914년 11월 3일 스위스 신문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에 기고한 글이다. 원제는‘O Freunde, nicht diese T ne!’로 독일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베토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 삽입된 「환희의 송가」에서 합창을 이끌어 내는 바리톤의 독창이 이 구절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최초로 밝힌 이 글에서 헤세는 조국 독일의 지식인들에게 전쟁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한다. 헤세는 지식인이라면 “국경을 초월한 인간성과 예술의 보편성을 믿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전쟁이라는 끔찍한 현실에 부딪쳐 자기가 지닌 최선의 것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린다면 그는 결코 지식인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헤세는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라는 말로 글을 끝맺는다.
「힘겨워하는 정치인에게―수상님께 보내는 편지」 1917년 8월 12일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에 기고한 글로 당시 독일 수상인 게오르크 미하엘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헤세는 이 글에서 수상에게 베토벤의 소나타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권한다. 그는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선(善)이 흘러나올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며 전쟁에 눈먼 정치인에게 한순간이나마 현실 세계의 참상을 보고 듣는 능력을 되돌려 줄 유일한 힘이라고 말한다.
「자라투스트라의 귀환」 1919년 익명으로 발표한 이 글에서 헤세는 니체의 작품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독일 젊은이들에게 패전의 충격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호소한다. 그는 이 글에서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행동과 고통이라는 요소는 뗄 수 없는 하나일세. 아이는 태어나는 일과 젖을 떼는 일을 고통스러워하며 결국은 죽을 때까지 여기저기서 괴로움을 겪네. 그러나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사랑하고 칭찬하는 모든 좋은 성질은 바로 그가 지닌 좋은 고통, 생생하게 살아 있는 훌륭하고 완전한 고통의 산물일세. 괴로워할 줄 안다는 것은 바로 완벽하게 사는 것일세.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괴로움이며, 성장은 고통이네. 씨앗은 땅을, 뿌리는 비를, 꽃봉오리는 피어나는 일을 괴로워하네.
헤세는 이렇게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며, 개인의 정신적 성장은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패전국의 젊은 벗에게」 1947년 일본의 젊은 독자가 보낸 편지에 대해 헤세가 쓴 답장이다. 헤세는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종이와 봉투를 구하는 일마저 어려워진’일본에서 자신의 안부를 물으려고 편지를 보낸 그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인 그가 헤세에게 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이렇게 얘기한다.
작가는 기껏해야 독자에게 진리의 빛을 통과시켜 주는 창문일 뿐입니다. 그는 영웅 정신이나 고귀한 의도 혹은 이상적인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의 가치는 단지 그가 창문이라는 점, 곧 빛을 방해하거나 차단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빛의 전달자 혹은 빛 자체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작가가 아주 고귀한 사람이 되거나 인류의 은인이 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면 바로 그 열망 때문에 그가 타락할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헤세가 생각하는 작가란 단지 빛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일 뿐, 결코 빛 자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누구의 은인도 되지 않으려 했고, 자신을 존경하는 독자에게 거만함과 겸손함을 초월하여 진리에 대한 사랑을 견지하는 데에만 전력하라고 충고한다.
이 외에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첫 새해를 맞는 독일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편지(「1946년 새해를 맞이하며」)와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 대한 고뇌를 다룬 편지(「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두 통의 편지」), 그리고 1946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보낸 수상 소감(「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등이 실려 있다.

목차

서문(1946)평화벗들이여, 그렇게는 이제 그만!(1914)힘겨워하는 정치인에게(1917)내가 전쟁을 잊는 방법(1917)포로들의 크리스마스(1917)평화는 올 것인가(1917)오 년 후의 세상(1918)유럽인에 관한 우화(1918)퇴근길의 백일몽(1918)전쟁과 평화(1918)세계사의 의미(1918)어느 왕국 이야기(1918)사랑의 길(1918)자신만의 감각(1919)자라투스트라의 귀환(1919)독일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1919)살인하지 마라(1919)중국인의 철학(1921)세계적 위기와 책(1937)시인의 비망록 중에서(1940)리기에서 쓴 마지막 일기(1945)1946년 새해를 맞이하며(1946)아델레 누님께(1946)독일에 부치는 편지(1946)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1946)감사와 설교(1946)패전국의 젊은 벗에게(1947)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두 통의 편지(1948)로맹 롤랑을 추모하며(1948)역자 후기

작가 소개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 남부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친 뒤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했으며, 열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십 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 『인도에서』, 『크눌프』 등을 발표했다. 스위스 몬타뇰라로 이사한 1919년을 전후로 헤세는 개인적인 삶에서 커다란 위기를 겪고, 이로 인해 그의 작품 세계도 전환점을 맞이한다. 술과 여인, 그림을 사랑한 어느 열정적인 화가의 마지막 여름을 그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과 『데미안』이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헤세는 이 작품들과 더불어 소위 ‘내면으로 가는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헤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며, 이후 그림은 음악과 더불어 헤세의 평생지기가 되었다. 그는 이어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동방순례』, 『유리알 유희』 등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하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인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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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호 옮김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부퍼탈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원대, 서울대, 인하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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